도심 속 정원, 부암동 석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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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블루 증상이나 누적된 업무 피로로 슬그머니 일상에서 비켜 있고 싶을 때가 있다. 우리나라 구석구석 풍광 좋은 곳이 많지만 자동차로 몇 시간씩 달려서 가야 하는 곳은 일정을 미리 계획해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계획 없이 훌쩍 떠나기란 사실 쉽지 않다. 잠깐 짬을 내서라도 산수화 같은 풍광이 펼쳐지는 공간이 도심 한복판에 있다는 것을 아는 이도 많을 테지만 아마 모르는 이도 있으리라. 귀한 것일수록 쉽지 않게 얻어지듯 이 풍광 좋은 곳을 만나기 위해서는 서울미술관이라는 곳을 통해서만 오를 수 있다. ‘물이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이라는 뜻을 품은 부암동 ‘석파정(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별장,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은 사계절 어느 때 찾아가도 “과연!”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림 관람하는 걸 즐기는 필자는 한 달 전에도 이곳 서울미술관에 들러 ‘거울 속의 거울’을 보고 석파정에 올라 풍광에 마음을 앗긴 채 한참을 산책했다. 추석 연휴에 석파정을 둘러볼 마음으로 서울미술관 홈페이지에 접속하니 ‘연애의 온도’ 전시 소식이 있어 후다닥 예약하고 지하철을 탔다.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려 버스로 환승하여 자하문터널 입구 정거장에서 내려 길 건너 서울미술관으로 올라갔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서울미술관과 석파정 각각 티켓을 살 수도 있었지만, 인원 제한으로 석파정과 서울미술관 통합 입장권 구매만 가능하다. “이 전시에서 말하는 ‘연애’의 대상은 사람일 수도, 사물일 수도 있으며, 이루지 못한 ‘꿈’이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둔 ‘희망’일 수도 있습니다. 이 전시는 사람의 마음, 그 온도를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연애의 온도라기보다 마음의 온도가 따뜻해진 플레이리스트 기법 전시는 다시 한번 더 관람하고 싶을 만큼 여운을 주었다. 2, 3층 전시를 보고 4층 바깥으로 나가면 수채화 같은 석파정 풍광이 눈 앞에 펼쳐진다.
▲ 수령 700여 년쯤 되었다는 천세송 아낙처럼 펑퍼짐한 바위에 흐르는 물
▲ 고종이 머물렀던 침소 별채 마루에서 보이는 북악산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의 별장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이 정원은 본래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의 별서였는데, 우연히 이곳에 들렀던 흥선대원군이 마음에 쏙 들었던지 팔라고 했지만 김흥근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다고 쉬이 체념할 리 없었던 흥선대원군이 명분을 위한 꿍꿍이속으로 별장을 하루만 빌려 달라고 하고 아들 고종을 데리고 와 묵었던 것이다. 임금이 머문 곳에 신하가 거주할 수 없었던 당시 관례대로 김흥근은 어쩔 수 없이 흥선대원군에게 석파정을 넘겨주게 되었단다. ‘석파’라는 이름도 흥선대원군의 아호에서 따와 붙여졌다고 한다.
▲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계곡에 숨어 있는 정자
석파정은 사방 어디를 보아도 절경이다. 도심 속 공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청정한 별세계다. 본래 석파정은 여덟 채로 지어졌었는데, 현재는 안채, 사랑채, 별채 그리고 “흐르는 물소리 속에 단풍을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뜻을 품은 정자가 남아 있다. 문살 문양과 담백한 평석교가 여태까지 봐 왔던 우리 고유의 정자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풍기고 있다. 정자 뒤로는 굽이굽이 흐르는 물줄기가 시각과 청각을 맑게 해준다. 단풍이 찬란한 늦가을에는 정자 언저리가 붉게 타들어 가는 듯한 절경이 여느 명산이 부럽지 않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 도심과 자연이 공존하는 풍경
▲ 코끼리를 닮았다는 너럭바위(좌) / 3개의 시냇물이 만난다는 삼계동(우)
고궁과 또 다른 느낌을 안겨주는 석파정은 운치 있는 산책로가 아주 정갈하다. 아기 폭포 같은 물줄기, 숲에서 쨍한 색채로 도드라진 벤치, 실로폰 건반 같은 돌계단 길, 펄쩍 뛰어오르면 손끝에 닿을 것 같은 뽀얀 구름, 게다가 기품 있는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있어 소박한 정취가 마음 정화하기에 그만이라 자주 찾게 된다. 올가을 석파정의 단풍은 또 몇 도의 온도로 타들어 갈지 벌써 가슴이 두근댄다.
50+시민기자단 김경희 기자 (bomsky6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