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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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용 필 「청복」
정파와 이념을 떠나 지금도 뇌리에 강렬하게 남은 소설을 들자면 난 주저 없이 최인훈의 『광장』과
이문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들고 싶다.
그 중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엄석대라는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엄석대에게 눈도장 찍고 싶은 시골 학교의 풍경을 실감 나게 풀었다. 우리의 정치사나 어지간한 집단이나 단체에서는 결만 달랐지
음모와 추종과 배신의 시나리오는 늘 있어 왔다.
어느 해 베트남 여행길에 작가와 산을 오르며 담소한 적이 있었다. 작가란 독자가 기르는 나무라지만 그때 『삼국지』로 낙양지가(洛陽紙價)를 올리던 때라서 나를 기억할 리 만무하다.
기억을 소환한 풍경 하나,
우리 현대사에서 제5공화국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염량세태(炎凉世態), 뜨거웠다가 차가워지는 세태(世態)」라는 뜻으로 권세(權勢)가 있을 때는 아첨(阿諂)하여 좇고 권세(權勢)가 떨어지면 푸대접하는 세속(世俗)의 형편(形便)을 가리키는 것으로「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고 정승이 죽으면 개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세태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현실은 냉혹하고 싸늘했다.
풍경 둘, 야당 대선후보 결과 일반여론에 선전하고도 당심에 밀려 고배들 든 낙선자의 메시지.
그는 “비록 26년 헌신한 당에서 헌신짝처럼 내팽개침을 당했어도 이 당은 제가 정치 인생을 마감할 곳”이라며 “이번 대선에서는 평당원으로 백의종군하겠다”라고 말했다.
50+ 에 들어서면 직장인 대부분이 은퇴라는 또 하나의 관문에 들어선다.
근무연수와 승진이 비례하는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보통 임금피크 진입을 앞두고 최고직급에 최고 대우를 받는다. 그러다가 막상 은퇴를 맡게 되면 천상으로 나락으로 수직 강하하는 느낌을 받는다,
나 역시 퇴직하고 나서 옛 근무지를 봐도 맘이 불편했는데 어차피 떠날라치면 박수받고 떠나 선비 흉내 내면서 가르치고 글 쓰고 배우자는 맘을 먹고 나서 새로운 복을 발견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세상에 온갖 복락이 있어도 그 복이란 두 가지라고 했다.
「열복(熱福)」과 「청복(淸福)」이다.
열복은 누구나 원하는 화끈한 복으로 높은 지위에 올라 비단옷을 입고 부귀를 누리고 사는 복으로 모두가 허리를 굽히고, 눈짓 하나에 알아서 긴다.
이에 반해 청복은 거친 옷에 짚신 신고 맑은 못가에서 소박하게 한세상을 건너는 것이다.
넉넉지 않아도 만족(滿足)할 줄 아니 부족(不足)함이 없다.
시골에 있다 하여 청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주식에 부동산에 자식 농사에 연금까지 챙기며 부자인 듯해도 아무것도 없는 자가 있고 실상이 스스로 가난하여 곤궁하여도 자산이 많은 부자가 있다.
자신의 앞가림에 열심(熱心)에 열정(熱情)이다 보면 열복을 얻는 사람은 많아도 청복을 얻는 자는 드물다.
권력에 초연하고 재물에 아등바등하지 않으며 사사로운 지혜를 버리고 허무한 것에 주목하지 않는 삶,
“구재아자무부족(求在我者無不足) 내게 있는 것을 구하면 족하지 않음이 없지만
구재외자하능족(求在外者何能足) 밖에 있는 것을 구하면 어찌 능히 만족하리요.
일표지수락유여(一瓢之水樂有餘) 한 바가지의 물로도 즐거움은 남아돌고
만전지수우부족(萬錢之羞憂不足) 값비싼 진수성찬으로도 근심은 끝이 없도다.
조선 시대 뛰어난 성리학자이자 이율곡조차도 학문적으로 높게 평가했다던 구봉 송익필의 「족부족(足不足)」이란 한시이다
만족이란 가장 귀한 것보다 다만 좋은 것을 구하는 것이다. (불구최귀 단구최호. 不求最貴 但求最好)
가난해도 만족에 처하며 게으르지 않고 성실히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낫다.
“내 나이 이순에 청복에 처하니/ 남들이야 부족하게 보아도 나는야 족하도다/
새벽 일찍 일어나 신문 보고/ 동산 일출에 동네 한 바퀴 돌고/
흰 구름 바람결에 절로 갔다 절로 오고/ 서쪽 바다 붉은 노을 멍하니 사색하면/
어느새 작은 달 토함산 벗어나고/ 어린 길고양이 벗 삼는 삼경이 무르익는다.”
50+시민기자단 황용필 기자 (yphwang@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