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이 불던 날 괴산 여우 숲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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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가 준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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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인연
오래전 숲에서 오는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있었다.
구본형 선생님과 구본형의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들이 요일마다 필진을 바꾸어 보내오는 ‘마음을 나누는 편지’였다.
그중에서도 매주 목요일에 배달되던 여우 숲 김용규 선생님의 편지를 가장 좋아했었다.
서른아홉 살, IT 회사 CEO 자리를 내어놓고 숲에서 두 번째 삶을 모색하는 흔들림과 불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끌림을 찾아가는 일상이 고스란히 편지 속에 녹아 있었다.
함께 살고 있는 개, 산이 와 바다 이야기부터, 홀로 흙집을 짓는 이야기.
집안에 함께 사는 벌과 벌레 이야기
홀로 불을 피우는 저녁 시간, 추위를 뚫고 자라는 명이나물
사부이신 구본형 선생님이 심었던 배롱나무 이야기,
고된 노동과 혼자만의 고군분투와 외로움이 스며있던 그분의 글은 명료하고 담백하고 솔직했으며 숲처럼 깊었다.
숲에서 온 편지를 한 줄 한 줄 밑줄을 쳐가면서 읽었다.
허락도 없이 슬그머니 내 글에 가져다 쓰기도 하고 어설픈 흉내를 내기도 하면서 한 번쯤 여우 숲에 가보리라 생각을 키웠다.
편지 곳곳에 그분의 눈물과 땀과 고된 노동이 고스란히 스며있고
보지 않아도 그림처럼 그려지는 그곳에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보리라고 막연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먹고사는 1차원적인 삶에 머물러 있었던 나는 연구원 도전도 여우 숲도 서서히 잊어버리고
끌림이 이끄는 모험보다는 가늘고 길게 가는 안전을 선택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정말 우연하게도 김용규 선생님 강의를 그것도 내가 사는 동네에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구로 마을자치센터 시니어 마을 살이 학교 가을학기 특강에서였다.
그리고 2주 후 여우 숲 방문 일정까지 막연하게 바라던 10월의 기적이 동시성으로 이루어졌다.
여우 숲은
괴산 산막이 옛길에서 가까운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산 15-1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해발 250~300m 높이에 위치한 자연 상태 그대로의 숲 공간이다.
여우목도리를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과 맹독성 쥐약의 보급으로
60년대 이 땅에서 사라진 여우가 되살아오는 날을 기다린다는 염원을 담아 여우 숲이라는 이름을 지었단다.
(여우 숲 가는 길)
여우 숲에는 의도한 불편함이 있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경사진 언덕 숲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 하고 스스로 머문 공간을 치우고 가져온 쓰레기를 되가져 가야 하는 불편함이다.
이 의도된 불편을 즐기는 과정이 몸과 마음과 사유를 통합하는 작은 과정의 하나임을 알아가라는 의도라고 한다.
(층층나무관)
여우 숲 시설은 숲 지기 주인장을 닮아 소박하고 간결하다.
잘 닦아 놓은 포장된 길도 보기 좋게 인위적으로 만든 정원도 없지만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투박함 그대로여서 더 정감이 가고 좋다.
자연 친화적으로 꾸며진 층층 나무관은 사무실과 강의실이 있고 숲 카페와 숙박시설인 숲 쉘터가 있다.
(사진출처 : 여우 숲 홈페이지 : 층층나무관 데크에서 바라본 풍광)
데크에서 바라보는 멋진 풍광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여우 숲이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이곳 숲 쉘터 에서의 1주일간의 휴식을 나의 위시리스트에 올려본다.
층층 나무관 이외에도 주차장에서 걸어 올라오다 보면 숲의 경사를 그대로 활용해 지은 생태 건축물인 졸참나무관이 있다.
이곳 역시 자연친화적인 휴식과 성찰의 특별함을 누릴 수 있는 숲 쉘터와 다목적 홀이 있다.
여우 숲은 좋은 삶이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수많은 어려움과 좌절을 거쳐 온 사람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숲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삶, 평화로운 삶을 구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치유를 얻는 숲이며
마을 공동체와 함께 일구어 가는 농도(農都)상생의 공간을 지향하고 있다.
혹여 괴산 여행을 가시거든 여우 숲에서의 하룻밤은 어떨까?
그곳에서 정말 괜찮은 숲 철학자를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가능하다면 김용규 선생님의 강의를 꼭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분의 강의는 우선 재미있다. 고개가 수십 번 끄떡여진다.
숲에서 배우는 지혜를 우리 삶에 연결하는 통찰이 놀랍다.
숲에서 배우는 좋은 삶의 지혜에 대한 그분의 강의는 울림이 컸다.
지금, 여기 현재를 살라
우리는 평생 미래를 위해 산다.
그러다 보니 순간순간 다가오는 삶의 과정들을 놓쳐 버린다.
한 번도 그 순간에 머물지 못한다.
나무나 새 그리고 풀은 지금, 여기 순간을 산다.
자귀나무는 저녁이 되면 팽압을 회수하고 잎을 접는다.
노동을 멈추고 휴식하고 쉬겠다는 신호다. 완벽하게 현재를 산다.
개안(開眼)을 가져라
냉이는 왜 다른 식물들보다 일찍 추위를 뚫고 삶을 시작할까?
겨울을 이겨낸 인내와 대견함 서러움 등 너의 겨울은 견딜 만했느냐고
단면 넘어 배경이나 사연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나이 든 사람의 특권은 사물이나 현상을 깊이 있게 볼 줄 안다는 것이다.
끌림(모험) 뒤에는 크고 작은 좌절과 마주하는 순간이 온다.
끌림에 따라나선 길 위에서 설렘은 잠깐이고 길고 험난한 과정이 기다린다.
햇살을 따르는 열망으로 틔워 낸 여린 나뭇잎이 애벌레와 짐승들에게 갉아 먹히고
뜯기는 상실과 마주해야 하듯, 빗방울에 젖으며 제 화분과 꿀을 지켜내야 하듯 크고 작은 좌절과 마주하는 순간이 온다.
그러한 좌절의 시간을 잘 지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첫째, 끌림 뒤에 오는 좌절은 운행의 섭리임을 온몸으로 배우고 받아들일 것
둘째, 좌절을 스승으로 모시며 끌림을 재검토하고 그 방향을 가감하게 조정할 것
셋째, 끌림을 따라나선 길 그 영역 위에서 작은 성취들을 쌓아 가는 것이다.
작은 성취의 근육을 키워 큰 성취가 가능한 근육을 만들고 비로소
제 고유의 근육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제 스타일로 지켜낸 잎과 꽃으로 가을날
기쁨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이제까지 세상이 요구하는 사회적 기준 속으로 나를 맞추며 살아왔지만 이젠 내가 그린 그림대로 살아야 한다.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험을 멈추고 포기하는 순간 삶은 시들어 간다.
우리 삶은 대극의 포용이다.
대극성(對極性)이란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갖고 있는 삶과 우주 구성 및 작동의 원리이다.
생명이 불완전함을 넘어 결국 자기다움으로 이르는 과정이 삶이다
신이 우리에게 주신 과제를 선물로 풀어내는 과정이 곧 삶이다.
가을바람이 불던 날, 괴산 여우 숲에서 우연한 기회가 준 선물을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퇴직 이후 인생 2막을 준비하면서 시행착오와 좌충우돌의 경험들이 결국, 나다움으로 이르는 과정이라는 것과
지금 여기 일상의 소중함을 잊고 먼 미래만을 위해 살아온 것,
모험 뒤에 다가오는 좌절의 순간이 두려워 늘 두드려보고 안전한 길 만을 선택했으며
사회나 가족이 원하는 기준 속에 나를 맞추면서 나다움을 잃어버리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여우 숲에서 돌아와 다시 시작하는 일상이 한동안 숲 향기로 가득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