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여인 영빈 이씨의 ‘선희궁’
“아바마마, 앞으로는 글공부도 열심히 하고 나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살려주세요!”
사도세자가 죽음을 명하는 아버지 영조에게 개과천선할 것을 다짐하며 호소한 말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조선왕조 500여 년의 역사에서 매우 극적인 사건이다. 너무나 유명한 왕실 가족의 이 비극적 이야기는 이미 여러 작품으로도 소개되어 인기몰이를 한 바가 있다. '이산'을 비롯한 여러 편의 드라마, 뮤지컬 '정조 대왕', 영화 '역린', '사도' 등이 그것이다. 특히 이준익 감독의 '사도'는 배우 유아인이 사도세자의 역을 맡아 아버지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바람과 원망하고 미워하는 이중의 감정을 잘 표현하여 사도세자의 아픔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영화였다.
각종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사도세자'하면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인 비정한 아버지 영조, 그 비극을 온몸으로 겪고 눈물의 삶을 살아낸 부인 혜경궁 홍씨, 그리고 효성 지극하고 조선 후기의 문물을 번성시킨 아들 정조가 떠오른다. 반면 그들의 그늘 뒤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는 조용히 가려져 있다.
사도 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햇살이 좋은 5월의 환한 날, 종로구 신교동 국립서울농학교 안에 있는 선희궁을 방문해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선희궁은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제사궁이다.
▲ 선희궁 (직접 촬영). 지금 건물은 1897년 고종 때 다시 지은 것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빈 이씨(1696~1764)는 후궁이었지만 영조와의 사이에서 1남 6녀를 두었을 만큼 왕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일례로 그녀가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사도세자를 낳았을 때 영조가 직접 그 곁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늦도록 아들이 없어 걱정이 많았던 영조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사도세자는 돌이 지나자 곧 세자로 책봉되었다.
사도세자는 어렸을 때 매우 영특하였으나, 영조의 지나친 사랑과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점점 부자간의 사이는 나빠져 갔다.
"아바마마께서 사랑해주시지 않아 상처를 받았으며, 또 늘 저를 꾸짖으시니 소자는 아바마마가 무섭사옵니다."
무섭게 몰아치는 영조 앞에서 항상 불안에 떨어야만 했던 사도세자의 이 말은 항상 가슴을 아프게 한다. 늦은 나이에 아들을 본 영조는 사도세자를 훌륭하게 키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큰 기대는 실망으로 이어졌고 끝내 사도세자는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다. 사람을 죽이는 등 광포한 행동을 계속하는 아들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영빈 이씨는 역모의 가능성까지 느끼게 되자 며느리와 손자를 지키기 위해 친아들을 죽여 달라고 눈물로 간청한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진하라고 명령하지만 세자가 따르지 않자, 뒤주에 집어넣게 된다. 그렇게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죽었다. 그의 나이 28세 때이다.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아들을 지켜본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의 3년 상이 끝난 바로 다음날 세상을 떠난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 하루라도 마음 편히 숨 쉬는 날이 없었을 것 같은 불행한 이 어머니에게 3년은 얼마나 가슴 저미는 시간이었을까? 짐작하기도 어렵다.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빗나간 사랑이 몰고 오는 비극은 동·서양을 넘어, 시대와 신분을 뛰어넘어 흔하게 있다. 지금 우리 곁에도 무수한 영조와 사도세자가 있지 않을까? 나는 제법 긴 세월 동안 중·고등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자식의 역량을 무시한 부모의 기대로 무너져 내리는 청소년을 많이 보아왔다. 몇 년간이나 성적을 고쳐가며 부모를 속여 온 학생도 있었고, 마치 부모에게 복수라도 하듯이 온갖 일탈행동으로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른 '폭력'의 결과이다.
그런가 하면 따뜻한 부모의 관심 아래 부족한 부분을 잘 채워가며 성장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부모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며 나 또한 부모로서 그 중압감에 힘들 때도 있었다. 지나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으면서 묵묵히 지켜보아 주고 응원하는 지혜로운 부모가 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자식이 이제는 성인이 된 지금도 영원한 숙제로만 느껴진다.
▲ 단청이 화려한 선희궁 내부 (직접 촬영)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정면을 제외한 삼면은 벽돌로 벽을 세우고,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선희궁은 단아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신주는 1908년(순종 2)에 황실 제사궁을 정리하면서 궁정도 칠궁(七宮·문화재명 ‘서울 육상궁’) 안에 합해졌다. 최근(6월 1일) 칠궁이 일반인들에게 개방됐다고 하니, 선희궁의 이야기가 더 궁금한 분들은 방문 신청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겉보기에 화려하지만 텅 비어 있는 선희궁의 모습은 마치 자식의 죽음을 청했던 영빈 이씨의 빈 자궁 같기도 하고, 가슴앓이로 새까맣게 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그녀의 가슴을 보는 듯했다. 안쓰러운 마음에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글/사진 : 50+시민기자단 김경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