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60년을 살아왔지만 쉼 없이 달려온 지난 시간들 속에 한 번도 시내 중심가에 살지 않았다. 나는 번잡한 강남이 아닌 서울시 외곽 도봉구에 살고 있다.
워킹맘으로 집과 직장을 오가며 주변을 살펴볼 겨를도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2014년 2월, 35년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며 내가 인생 후반을 살아야할 곳이 어디일까 많이 고민하고, 지인들이 추천해 주는 곳들을 직접 다녀보기도 했다. 결론은 살아온 그대로 도봉구 북한산 자락 우이천변 쌍문동이었다.
이 동네에는 하천이 3개나 있다. 가까운 곳에 우이천이 있고, 방학천도 있고, 무수천도 있다. 더군다나 물이 1급수처럼 맑다. 동네 이름도 재미있는 의미가 담겨 있다.
쌍문동(雙門洞)은 생시에 부모를 정성껏 모시지 못한 것을 후회하여 부모의 묘 앞에 움집을 짓고 여러 해 동안 기거하다가 그 아들이 죽자 마을 사람들이 그의 효성을 지극히 여겨 그의 묘 근처에 효자문(孝子門)을 두 개 세운 데서 쌍문(雙門)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또한 이웃인 방학동(放鶴洞)은 조선시대 어느 임금이 서원
터를 보러왔다가 도봉산 기슭에서 잠시 쉬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학들이 너무 즐겁고 신나게 하천에서 놀고 있어 방학(放鶴), 즉 '학이 노는 마을'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설이 있다.(출처: 서울실록)
남들이 출근하느라고 정신없는 월요일에도 나는 이 멋진 하천을 끼고 아침산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35년간의 교직생활을 마친 직후에는 나는 한가한데 남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게 이해가 안되고, 내가 산책을 하고 있는데 멀리 학교에서 시끄럽게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는 게 낯설기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씩 지나자
현재 나의 생활에 익숙해지며, 차츰 주변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상사는 법을 배우고 있는 갓 부화한 오리 새끼들에 감격하고, 가끔 원앙 떼들이 몰려와 오리들과 싸우는 모습에는 나도 모르게 웃음 짓게 된다.
우이천변의 깊지 않은 물속에는 팔뚝만한 잉어 등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산란의 고통을 눈앞에서 보여주고, 자라인지 거북새끼인지 모를 것들은 일광욕을 하고 있다. 물고기를 찾아 헤매는 천연기념물 백로와 왜가리의 모습은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베란다에서 바라본 눈 덮힌 북한산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요즘 같은 가을 단풍의 계절에는 멀리 나가지 않아도 눈앞에 황홀한 단풍이 이어진다.
이렇듯 자연과 가까이 산다는 건 그냥 날마다 선물을 받는 기분이다.
온 세상이 가을빛으로 물드는 지금. 11월. 늦가을.
어느 명소보다 따뜻하고 황홀하고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내 동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내가 살아갈 이곳.
가을 햇살과 함께 어딘가로 가을 감성을 느끼러 떠나고 싶은 계절이지만, 나는 이곳 북한산 자락에 자연을 느끼며 살고 있다.
윌리엄 새들러(W.Sadler)는 그의 책 <서드 에이지(Third Age)>에서 성공적인 노화를 위해서는 장수혁명으로 새롭게 생겨난 40대에서 70대까지의 30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어쩌다 자리 잡은 이곳이 내겐 '서드 에이지'를 충족한 삶으로 만들어 줄 거라는 기대감을 갖고, 난 오늘도 우이천변을 걷는다.